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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은 짜릿했다
[정윤수 칼럼] 2004 아테네 올림픽이 남긴 기억들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정윤수(jys2003) 기자

▲ 30일 새벽 아테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폐막식에서 시작을 알리는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다.

ⓒ2004 연합뉴스

결국 밤을 새우고 말았다. LA 올림픽 이후 수도 없이 봐온 그 흔한 개막식과 달리 장중한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그야말로 '느림'의 미학이요 '정중동'의 풍요로움으로 가득찼던 개막식과 달리, 저것이 과연 같은 나라 사람들의 작품인가 싶을 정도로 무미건조한 폐막식이었건만, 결국 밤새워 보고 말았다.

온전히 올림픽에 바쳐버린 나의 지난 여름을 위한 마지막 의례였는지 모른다. 사실 지난 17박 18일의 일상은 산산이 파괴된 상태였다. 거의 모든 원고는 마감을 며칠 넘겨서야 겨우 썼고, 각종 회의는 때마다 늦었으며 그나마도 꾸벅꾸벅 졸았다. 그랬으니 폐막식을 놓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우선 개막식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직 그리스만이 연출할 수 있는 전율에 가까운 '느림'의 미학은 온갖 현란한 율동과 요란한 깜짝쇼로 일관해온 에너지 과잉의 개막식 역사를 완전히 새로 썼다. 장려한 서사시의 대미는 'DNA'가 장식하였는데 보편과 특수의 인류사를 관통한 그 절정의 이벤트는 순식간에 철학의 수준으로 상승했던 것이다.

이로써 아이슬란드의 가수 비욕이 개막식 찬가로 부른 노랫말은 그 흔한 승리에의 예찬이 아니라, 일회적인 개인사의 숙명과 영구한 인류사의 엄숙성을 에게해로 연출된 아테네 메인 스타디움의 선수들로 하여금 교차시켰던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딸들아, 너희가 흘리는 땀방울은 나의 젖이란다."

그렇게 아테네 올림픽은 시작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이지만 최고의 명승부는 여자 장대높이뛰기와 여자 핸드볼 결승전. 이신바예바, 페오파노바, 이상은, 오성옥은 다른 페이지에 기록해 둘 만하다. 스포츠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우위에 놓이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경기를 통하여 선수들은 세상의 비속함과 찰나의 운명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판관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끝없이 바위를 굴려야만 하는 시지프스로서의 우리네 운명을 여실히 증명했던 것이다.

또한 양태영과 리마 선수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불투명한 판정은 우리의 양태영과 더불어 '아직까지' 금메달리스트인 폴 햄 선수의 내면에도 깊은 그늘을 드리웠고, 레이스 내내 촬영 오토바이에 다치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했던 마라톤 코스에서는 종말론 추종자로 알려진 아일랜드인의 돌발 사태로 인하여 35km까지의 1인자인 브라질의 리마 선수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가 3위로 들어오면서 날갯짓을 하는 모습에서는, 나는 축구 선수 호나우딩요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그 천부적인 낙천성 앞에 정중히 모자를 벗고 싶었다.

잠시 숨을 고르건대, 그럼에도 아쉬운 대목이 있으니 바로 우리 방송사의 중계 수준이다. 우리는 물론 올림픽을 봤지만 사실은 그 '중계'를 보고들은 것이므로 이에 대해 몇 마디 없을 수 없다. 그 옛날의 '금메달 타령'이나 '국위 선양'은 많이 사라져서 그나마 다행이랄까. 하지만 공허하기 짝이 없는 감정적인 찬사의 남발은, 솔직히 시끄러웠다.

투박하면서도 호소력 짙은 어투의 김병주(유도), 선수보다 더 떨리는 목소리의 김수녕(양궁), 캐스터인지 해설자인지 분간이 안 되는 장재근(육상), 그리고 '아자자자, 넘겨버려' 심권호(레슬링)까지 포함하여 역대 메달리스트들이 총출동한 해설위원들은 충분히 제 몫을 했다. 그들의 실수에 가까운 개성은 이용수나 신문선(축구)과 달리 '직업' 해설가가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것.

그러나 각 방송사의 캐스터는 기대 이하. 오직 KBS의 백전노장 류수호와 김성수, 그리고 이재후만이 올림픽의 무게가 상당히 육중한 것임을 알려줬을 뿐이다. 그 나머지는 대체로 '스포츠의 내면'보다 그 경기장의 '온도'를 전하는데 급급했다.

일곱 차례나 올림픽에 참가한 영원한 '은메달리스트' 멀린 오티(44)에게 겨우 '나이를 잊은 노장'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는가. 그 장려한 개막식을 보면서 송재익과 송인득은 '밤하늘을 찬란하게 비추는 폭죽', '우정과 화합의 제전'이라는 단어 외에 찾을 수 없었던가.

특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SBS 배기완 캐스터의 여자 마라톤 중계. 40km를 넘게 뛰고 있는 일본 선수를 보면서 캐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과연 누가 금메달을 따면 좋을지…. 제 속마음은 따로 있지만 차마 말을 할 수는 없군요." 이런! 아무리 생중계라지만 도대체 상식 이하의 멘트 아닌가. 2위나 3위로 한국 선수가 뒤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40km를 심장이 터지도록 뛰고 있는 선수를 보면서 그가 금메달을 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멘트를 할 수 있는지.

또한 카메라는 얼마나 공격적이었던가. 메달권에서 멀리 벗어나 화면에도 보이지 않는 이봉주와 지영준의 가족들에게 왜 고통스런 답을 요구한단 말인가. 어차피 출동한 카메라라고 해도 그 순간만큼은 실망과 격려가 교차하는 가족들의 표정을 가만히 담는 것만으로도 수만 가지 위로의 말을 대체하는 게 아닌가.

결정적인 것은 역시 한국 축구 경기. SBS가 '재치'있는 편성으로 시청률을 앞서가자 나머지 방송사도 흥행 이벤트에 골몰했다. 김호곤 감독의 이해하기 어려운 용병술 말고 또 하나의 패인을 꼽으라면 나는 바로 그 호들갑을 들고 싶다. 분석과 예측은 고사하고 마치 '4강 축하 공연'이나 된 듯한 그 호들갑으로 인하여 패배의 쓴 맛은 더욱 진했다.

더불어 지적하건대 현장에서 90분 내내 꽹과리를 치고 태평소를 불어댄 응원은 오히려 방해 요소다. 물론 그 열정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붉은 악마'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6열 종대로 서서 경기 흐름과는 아랑곳없이 90분 내내 꽹과리에 태평소를 불어댄 '순수한' 응원은 선수들의 심리적인 리듬을 교란시킬 뿐이다. 문제는 태평소냐, 트럼펫이냐가 아니다. 박수와 고함으로 선수들의 육체적 리듬과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올림픽이 끝났다. 며칠 동안 '하이라이트'를 음미하며 착란 상태에 빠진 일상의 낮과 밤을 추슬러야 할 때가 되었다. '지겨운' 일상이 시작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범속화되고 서열화되는 오늘날에 어쩌면 명백히 '순위'를 갈라야만 하는 스포츠만큼 역설적으로 순도 높은 언어는 달리 없을 것이다. 세상살이가 음모와 타협과 배신으로 전락하는 이 때에, 면전에서 침을 뱉고 돌아서서 뒤통수를 갈기는 세태에 그래도 스포츠만큼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규칙 속에서 이슬처럼 투명한 세계를 보여줬다. 그 격렬한 에너지의 탄성으로 한여름 밤의 꿈은, 짜릿했다.

며칠 동안 우리는 탈속했던 것이다.